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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2010-03-11 작성)

사랑 얘기

by 박승만 2022. 11. 8.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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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공학이란 것은 서울 전체에 한두 학교 뿐이엇던 시절이었다. 이리 말해도 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당시 교회는 참 좋은 이성 교제의 장소였다. ㅎㅎㅎ. 내 사랑의 발자취들을 더듬어 보니, 중고등학교에 사랑했던 여자 애들은 모두 교회에서 만난 애들이니 말이다. 또 결국은 아내를 교회에서 만나 결혼하게 된 나 자신의 결과를 보더라도, 교회는 2010년 현재도 정말로 좋은 곳이엇다. ㅎㅎㅎ. 사실 그 당시에 여자 애들 만나는 곳은 교회를 제외하면, 다른 학교 학생들과 하는 소위 문학 써클 같은 것 뿐이었을 정도이니 그럴 수 밖에 없는 시절이었다. 그것도 고등학교 2 - 3 학년 때나 가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하여간, 난 요즘도 교회에서 젊은 남녀들을 보면 교회에서 연애하라고,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꼭 얘기해 주곤 하고, 또 그리 믿는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중 1 이던 보름달 같이 동그란 얼굴의 그 첫 사랑의 여자 아이는 활달하기도 했고, 말도 잘하고, 사교적이기도 하였다. 이것 저것을 비교적 다 잘하는 아이였다. 난 주일학교 중등부에서 회장을 맡고 잇었고,  그 아이는 부회장을 맡고 있었다. 교회 일을 하며, 함께 손이 시꺼매지는 등사기로 주보도 밀고, 성가대도 하는 등 - 이것 저것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   

 

지금도 잇는지는 모르지만, 경희대 앞의 길에는 유명한 두 군데의 빵집이 있었다 - 그린 하우스와 나중에 생긴 그랜드 였다. 그린 하우스에서 따뜻한 우유와 달콤한 녹힌 버터를 얹은 식빵을 파먹는 것이 - 그 당시, 그 동네 중고등학생들에게는 앞서 나가는 연애의 정석이었다. ㅎㅎㅎ. 돈이 없어서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교회 후 중학생 남자 여자 아이들은 그 빵집에 모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하고 놀러 다니곤 햇다. 물론 그 여자 아이도 그중 하나엿고, 아마 잘은 모르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 여자에게 향하는 나의 마음을 눈치로 알고 잇었을 것 같기도 하다.

 

첫 짝사랑의 여자 애와는 달리, 이 여자아이는 깊이 인각된 어떤 하나의 모습은 없다. 굳이 기억해 보자면, 노래를 참으로 잘하던 모습 정도 뿐 ---. 그렇지만, 그 여자 아이는 조금씩 조금씩 어느덧 내 마음속에 깊이 자리하게 되었고, 그게 첫 사랑이란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보고 싶고, 손도 잡고 싶고, 노래도 같이 해 보고 싶었고, 하여간 같이 잇고 싶었다. 그렇지만, 둘 만 따로 있던 시간은 무척이나 드물었고, 설사 그런 챤스가 왔을 때도 금욕의 도를 닦는 사람처럼, 아니면 교회에서 사랑하는 것이 죄라도 되는 것 처럼 여기며 난 사랑의 감정을 꾹꾹 눌러 버리며 그 챤스를 날려 보내고 있엇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여자 아이를 그리며 가슴만 앓던 나는 -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열정에 사로 잡혀 그만 저질러 버리고 말았다 - 몇 장의 긴 사랑 고백 편지를 써서, 그 집으로 속달로 부쳐 버린 것이다 --------.

 

편지를 보낸 후, 항상 교회에서 볼수 잇던 그 여자 아이가 한동안 보이지 않게 되엇었다. 보이지도 않고, 태어나 처음 쓴 연애 편지의 답을 기다리던 나는 며칠 간 애태우며 기다렸던 -  처절한 기억의 며칠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2 - 3 주 후에 그 여자 아이는 다시 나타낫고, 밝은 얼굴로 나를 따로 만나자고 하였다. 물론, 그 당시 유일한 중고등학생 데이트 장소인 그린하우스에서 따뜻한 우유와 달콤한 녹힌 버터를 얹은 식빵을 놓고 우리의 운명의 만남이 잇었다. ---- 하지만, 밝은 얼굴로 시작한 그 아이의 얘기는 ~~~ 내게 무지 어둡게 들리기만 했다.

 

이야기인 즉은 - 속달로 부친 내 편지는 그야말로 속달로 전해져서, 편지를 부친 그 날밤 한 밤중 11시반에 오토바이로 배달 되엇단다. ㅎㅎㅎ. 난 그 당시 한국의 우체국이 그리 정성으로 서비스 하는지 정말 몰랐고, 그 이후론 한국에서 평생 속달로 부쳐 본 적이 없어, 항상 그리 배달 되는지 아직도 모른다. 하여간 밤 11시반에 그 집 대문을 두드리며 배달된 그 편지는 - 뭔 큰일이 난 줄 알고 받은 그 아이 부모님에게 속속들이 읽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중학교 1 학년 여자 아이가 속달로 연애 편지 받는 것에 쇼크 받으신 그 부모님은 아이를 한동안 교회도 못가게 금족령을 내렸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공부하여야 하는 나이에 연애 편지는 좀 너무 이르다는 그 아이의 얘기엿었다.

 

이 이야기를 하며 밝게 웃는 그 여자아이의 얼굴을 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잇으며,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점점 굳어져 가던 나 자신의 얼굴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사랑 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말을 그리 밝게 얘기하는 그 아이가 - 내 사랑의 고백을 거절하는 것이라고, 난 지독히 오해하고 잇엇고, 난 점점 식어가는 달콤한 버터 식빵만 쓰디 쓴 쓰라림으로 내려다 보던 것을 기억한다. 얘가 이리 쓰디 쓴 얘기를 왜 이리 밝게 얘기하는 것인가? 맘속으로 되뇌이면서 고개를 숙인채 듣고만 있었다. 몇년이 지난 후에야 다른 여자 아이의 말을 통해서, 그 여자 아이는 내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엇다. (첫 키스에 대한 얘기에 포함 될 것). 첫 사랑이 또 하나의 참담한 일방적 짝사랑이었다고 오해 해 버렸었다. 

 

결국, 내 오해로 말미암아, 내 첫사랑은 또 하나의 빈 껍데기 처럼 사진 한장 남긴 것 없이 그리 흘러가 버렸지만, 이 아이는 나의 첫 사랑 이엇다. 그리워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해 준 여자 였고, 사랑하는 마음의 외로움이 뭔가를 알게 해 준 여자 아이였다. 이 아이와는 대학 시절까지도 계속 뭔가 긴장된 관계가 계속 이어졌었다. 더 이상 사랑의 고백 편지는 아니었지만, 사랑의 냄새를 살짝 풍기는 친구 수준의 편지는 가끔 이어졌엇다. 추운 눈 오는 겨울날, 경희대 뒷산인지, 불암산인지 함께 등산 가서 서로 손 잡지도 못한 채, 우산 끄트머리를 이어잡고 서로 이끌어 주기도 햇고, 아쉬운 눈길이 중간 중간 마주치기도 하엿고, 뭔가 할 말이 많았지만 항상 말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그런 관계로 이어져 갔었다. 어쩌다 손 잡게 될 때는 일부러 아무 것도 아닌척 내 두근 거리던 마음을 숨키려 최선을 다하는 그런 관계로 이어졌다.

 

그 아이가 서울 여자 대학을 갔을때, 난 축제 파트너로 가기도 하였고, 주위 선후배들도 재네들 뭔가 잇는게 아냐? 하는 눈초리를 받으며 지내는 세월이 가늘게 이어져 갔었다. 중고등학교 때의 나에게 깊은 영향을 준 이 아이는, 대학을 졸업한 이후론 못 보게 되었다. 몇 년 전에 교회 후배를 통해 알게 된 것은 전도사님과 결혼하였다는 것과, 서울의 한 교회에서 남편과 함께 목사 사모로서 교회를 섬긴다고 전해 들었다. 물론, 혹시라도 연락이 된다면, 지금이라도 만나서 옛날을 돌아 보고 싶다. 그때의 그린하우스를 더듬어 보고 싶기도 하고, 말 못한채 지나쳐 버렸던 것들을 기억 나는대로 얘기해 보고 싶기도 하다. 내 인생의 첫 사랑의 여인을 기억과 함께 만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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