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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사는 일 - 나의 직업 (1) (2019-06-01 작성)

사는 얘기

by 박승만 2022. 11. 12.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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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년간 해 온 내 직업은 정부를 상대로 consultant 로서 자료 분석을 해 주는 일이었다. 맨 처음에 시작할 때는 Walter Reed Institute 의 일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엇다. 사실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약 2년간 많은 연구와 고민을 했었다. Carnegie Mellon 대학원 졸업 후, 조그만 회사에서 일하면서, 내가 할 수 잇는 것이 어떤 일이 있는지 알아 보려고, 퇴근 후 또 주말마다 도서관에 가서 어지간히 파고 또 팠다. 나름 나만의 기준이 있었다. 1. 탈세하지 않는, 거짓말 하지 않는 일. 2. 아이들이 챙피해 하지 않는 일. 3. 가능하면 아이들에게도 물려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사실 첫번째 기준에는 (거짓말) 나름 이유가 있었다. 둘째가 태어난 후, town house 를 사게 되었다. 식구가 많아 지면서, 방이 더 필요했고, 지하실은 내 일을 하게되면 사무실로 쓰려고 하여서였다. 당시 아내는 연방 정부에서 일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이었고, 나도 쥐꼬리 만한 월급쟁이였었다. 융자를 받기 위해 몇 년간 세금 보고한 내용을 은행에 제출해야 하는데, 좀 부족한 점이 있었다. 아는 사람 중 은행 융자를 하는 전문가가 있어 물어보니, 걱정 말라고 하여서 그 분께 일을 맡겼었다. 그런데 나중에 집을 구입하고 모든 서류에 sign 을 하려고 가서 보니, 우리 세금보고 내용이 더 많이 번 것처럼 바뀌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마지막 sign 을 하는 자리여서, 그 자리에서 어찌 된 일인지 물어 볼수도 없어서 그냥 다 마쳤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당시에는 서류를 변조하여서 집을 사는 것이 거의 사회 통념처럼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크리스챤으로써, 그때의 죄책감이 나를 꽤나 괴롭혔었다. 나는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이미 벌어진 것이었지만, 그것으로 내 책임을 면할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 이후로 나는 어떤 일을 하든지, 어쩔수 있건, 어쩔수 없건, 거짓말을 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었다.  

 

그리 research 를 하던 중, 내가 하는 일이 가장 잘 맞아 보엿다. 정부를 상대로 일을 하는 것이니,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또 일 자체도 재밋고, 내 세가지 조건에 다 잘 맞아 떨어졌다. 그래서 무턱대고 나의 사업으로 시작하였다. 사실 walter reed 의 첫 일은 너무나 쉽게 일을 건졌었다. 일생 처음 써 본 proposal 이 덜컥 받아 들여졌다. 미국 해병대 훈련소가 있는 Parris Island 의 기후 조건과 훈련생들의 부상과의 상관관계를 분석하는 그런 일이었다. 일도 재밋었고, 내게 일을 맡긴 두명의 principal investigators 들도 아주 좋은 사람들이었다. 27년 전 당시로, 6개월에 2만불 가량 되었던 보수는 적은 돈이었지만 처음이니 그렇다고 스스로 위안하며 넘어 갈 수 있었다. 그런데 -- 너무나 쉽게 첫 일을 건져서 - 인간의 영원한 죄성인 교만이 나를 사로 잡았다. 다음 일도 그리 쉽게 건질 줄 알았다 -- 에고! ??

 

교만의 결과물이었나? -- ? 바로 그때부터 고난의 시작이었다. 다음 일을 위해, 온갓 정부 기관은 다 죽어라 돌아 다니며 정보를 얻으려 노력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분야의 studies & analyses 에 관계된 일을 얻으려 미 연방 노동성에 열심히 쫒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수없이 proposal 을 써내고 ---. 별의 별 정부 기관은 다 쫒아 다녔다. 하지만, 일을 건지는 것이 이리 힘든 것이고, 내가 가진 실력이라는 것이 이리도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는 고난의 시절이었다. 죽어라 고생해서 가까스로 미 노동성의 Pension & Welfare Administration 에서 얻은 일을 포함해서 (이 final report 는 national technology information system 에 저장되어 있음), 1993 - 1995 년까지 약 3년 동안 내가 벌은 돈은 다 합해서 약 2 - 3 만불 가량이 전부였다 --- ????

 

사실, 이때 아내의 고생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세 아이를 낳고 키우며, 게다가 시어머니와, 잠시이긴 하지만, 시할머니까지 모시고 살며, 직장 일을 할 수 밖에 없던 그 시절의 아내는 그야말로 super woman 이었다. 쪼들린 살림에 아내도 지쳐 갔고, 나도 어찌 할지 모르며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못하는 책임감에 아내 앞에서 한없이 쭈그러 들어 갔다. 

 

이 당시는 그야말로 죽어라 proposal 을 써대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눈에 띄이면, 죽어라 proposal 을 써 제출했다. 매일 미 국회 도서관과 매릴랜드 대학 도서관이 내 사무실이다시피 하였다. 그리 죽어라 써서 제출했지만, 경쟁에서 맨날 밀려나기만 하였다. 이 미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처절한 경쟁 사회인지 철저히 알게된 그런 기간이었고, 내 첫 일이 그야말로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었으면, 말도 않되는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참고로 studies & analyses proposal 은 쉽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분석해야 하는 분야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경험이 많아야 쓸 수 있고, 내게 그런 전문적 qualification 이 없으면, 대학이라든가 큰 consulting firm 과 협력해서 관련된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한 팀이 되어서 써야 한다. Objective 마다 methodology 도 다 다를 수 밖에 없고, 접근 방법도 다 다를 수 밖에 없다. 보통 큰 consulting 회사에서도 여러명이 달라 붙어 한 달 가량 걸려야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을 나는 networking 되는 사람들도 별로 없으면서, 많이 써 낸 해에는 약 30여개의 proposal 을 써서 제출하였고, 그중 하나도 건지지 못한 해도 있었었다. 사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당시 그리 써 대었던 proposal 들이 얼마나 한심한, 말도 않되는 것들 이었는지 기가 막힐 뿐이다. 

 

아직까지도 생생히 하루 밤을 기억한다.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밤일 것이다. proposal 이 않되어서 debriefing 에 (왜 떨어졌는지 설명을 듣는 meeting) 참석하고는 너무나 낙담이 된 날이었다. official meeting  이기에 양복은 차려 입었지만, 미팅 후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눈물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나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였고, 도대체 어떻게 하여야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잇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를 둘러 봐도 짙은 암흑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정말로 아무 것도 없어 보였다. 애들 셋의 가장으로 가족들을 어떻게 먹여 살릴 수 있는지 정말로 기가 막혔다. 펑펑 울며, 하나님께 하소연하며 계속 정처 없이 차를 몰았다. 

 

집에 연락도 않고 끝없이 운전을 계속하였다. Ocean city 쪽으로 갔다가 Delaware 를 지났다고 기억되긴 하지만, 정확히 어디를 어떻게 다녔는지도 잘 몰랐다. 늦은 오후에 집에 돌아 오는 길에 그 모양이 되었고, 얼마나 오래 운전했는지도 잘 몰랐다. 한참 후에 뒤에서 경찰차가 따라 붙어 siren 을 울린 다음에야 정신을 차릴수 있었다. 알고 보니 경찰에게 잡힌 시간이 어느새 새벽 2-3 시 가량 되었고, 내가 운전하던 곳이 New Jersey turnpike 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울며 정처없이 끝없이 운전하다가, 잠시 졸며 운전하게 되었고, lane 을 벋어 나기도 하면서 운전하는 것을 지나치던 경찰이 보고 세운 것이었다.  ------- 참 기가 막힌 꼬라지 였고 잊을 수 없는 처절한 밤이었다. 쓰다 보니 약 24-25 년 전 쯤 그때의 처절함이 다시금 확 다가 온다. 다음에 계속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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