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선악과를 통해 본 선과 악 (2011-05-16 작성)

신앙 얘기

by 박승만 2022. 11. 9. 00:00

본문

성경은 쉽지 않다. 성경이 쉽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그저 대충 읽은 것이거나, 나와는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읽은 사람 뿐이리라 믿는다. 신앙 생활을 해오는 중, 성경상의 이야기 중, ‘공의로우시고 공평하신 하나님’ 이란 개념이 무색하리만큼, 많은 이야기가 공의롭지 않고 불공평하게 들리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바울과 바나바도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왜 남자답고 의리있고 리더쉽 많은 바나바 보다, 깐깐하고 따지기 좋아하고 듣기에 따라서 교만해 보이기도 하는 바울을 들어 쓰셨을까? 하나님께서는 왜 그리 문제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주셨을까? 아내를 미끼로 살아 남고자 한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도 그렇고, 너무나 문제가 많아 사기꾼 책략가라는 이름의 야곱도 그렇고 - 어찌 그런 사람들이 축복의 통로로 될수가 잇을까?

 

요즘 시대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버림받을 수 밖에 없는 못된 인간들의 상징으로 다뤄질 것이다. 그중 압권은 다윗이라 생각한다. 삼하 7:8-9에서[1] 엄청난 축복의 말씀을 받은 다윗이, 11장에 가서는 자신의 충실하고 의로운 부하 우리아의 아내를 탐내 그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다. 나단의 직언으로, 다윗이 그 죄의 삯을 치뤘다 할지라도, 이런 다윗을 축복하신 하나님을 어찌 공의롭고 공평하시다 말할 수 잇을까? 물론 그에 대한 답은 수없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많은 신학자들이 그런 고민을 했으리라 믿고, 신학자가 아닌 평신도로서 나는 신학적인 정답을 알고 잇지도 않다. 하지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나만의 이해는 가지고 있다. 지식이 많은 신학자가 보기에는 문제가 많은 해석일지도 모르고, 또 반대로 정확한 해석일지도 모르지만, 내게 중요한 것은 오랜 세월의 고민 끝에 나만의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내겐 무척이나 중요했다. 그 나만의 이해를 얘기해 보려 한다.

 

그 이해의 시작은 에덴 동산에서 부터 이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선악과 나무를 두셨고, 그것을 먹지 말게 하셨다. 전통적으로 이 부분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불순종하는 것에 그 해석의 촛점이 맟여져 온 것 같다. 그것이 전부일까? --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그것을 먹으면 ‘죽으리라’ 라고 말씀하셨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었고, 그 결과는 이상하게도 뱀의 말했던대로 되었다. 아담은 죽지도 않앗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잇게 되었고 하나님처럼 신이 된 것이다 (창 3장22절).[2]

 

이 이야기를 읽고나면 몇 가지 의문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이 선악을 알기를 원치 않으신 것일까? 또한, 왜 인간이 선악을 알게 되면 죽으리라고 하신 것일까? 어찌 죽으리라 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워지지 않고 뱀의 말이 그대로 이루워진것인가?

 

결국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 결론은:

1. 우리에게 죽음이란 에덴에서 쫒겨난 것으로 상징된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고,

2. 근본적으로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고,

3. 우리 인간에게는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어서, 심판관이 되어서, 선악을 구별하고자 하는 숨어있는 욕망이 있고,

4. 그 욕망이 바로 원죄이었고, 모든 사람을 멸망의 길로 인도한 근본 죄라는 것이다.

 

이 결론이 아닌 다른 해석이 있을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다른 해석의 결론은 사탄인 뱀이 하나님보다 더 위대하다는 엄청나게 한심한 결론 밖에 나올수가 없으리라 생각된다. 조금 더 깊이 보면, 결론 1. 죽음이란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대목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잇으리라 생각하기에, 또 전통적 신학과 일치하기에 그냥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2, 3, 4의 결론은 조금 문제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과 악을 구별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선과 악을 구별치 않으면서 우리가 크리스챤으로써 어떻게 악을 피하고 선한 삶을 살 수 있단 말인가? 라는 당연한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그렇다고, 1의 결론만 수용하고, 2, 3, 4의 결론은 다른 해석을 한다면, 짜깁기 식의 성경 해석을 한다는 비난을 피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2, 3, 4의 결론도 성경적으로 옳바른 결론인가?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역이고 우리가 하지 말아야 될 것이라는 결론이 옳바르다면, 우리에게 선과 악을 구별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들은 (예를 들자면, 누가 17:3, 히 5:14)[3] 어찌 이해 될 수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유일한 해석은 – 사람은 원칙적으로 선악의 판단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서, 선악의 판단을 다른 것이 아닌 성경에 맞게 하여야 하고, 사람에 대하여는 근본적인 motivation을 모르기 전에는 판단 내리기를 극히 조심하라는 것 이었다. 그렇게 해석을 하고 나니, 모든 것이 맞아 떨어졌다. 가라지가 있음을 알고도 추수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심판의 날에 풀무불에 던지시는 가라지의 비유에서와 같이, 또 우리가 행한대로 심판대 앞에서 심판 받게 된다는 고린도후서 5:10의 말씀 같이[4], 또 앞에서 note 한 성경 구절들과도 맞아 떨어졌다.

 

결국,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보듯이, 성경에서 말하는 선악의 개념은 motivation의 문제이기에, 어떤 일이 잇엇는가? 아니면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를 생각하기 보다는 무슨 마음으로 그리 되었는가? 를 생각하여야 한다. 하지만, 섣부르게 motivation 을 짐작하여 선악으로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할 바가 아니요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다른 사람의 근본적인 motivation을 정확히 알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데 문제가 있기에, 선악의 판단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정확한 말씀이라 생각된다. 결국 선악의 심판은 하나님의 영역인 것이다.

 

사는 동안 우리 자신이 피해가야 할 것을 알기위해, 우리는 성경적인 선악의 개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성경적인 선악의 개념과 우리가 속한 사회의 선악의 개념이 같지 않다는데 있는 것 같다. 성경적인 선악과 사회적인 선악이 같다면 좋을텐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이 사회가 성경적인 선악과 일치하기는 불가능하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상식적인 사회적/도덕적/법률적 선악의 구별을 신앙적인 문제에 그냥 상식적으로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까 말햇던 다윗의 이야기처럼, 요즘 시대에 이런 사건이 있었다면, 다윗 왕은 당장 탄핵이 된 것은 물론이요, 인간으로 대접 받는 것조차도 의심하게 되는 상황 일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을 들어 쓰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않으셨지 않는가?

 

혹시라도, 어떤 사람은 이리 말할 수도 잇으리라. “성경이 쓰여질 당시의 죄의 정의가 오늘 날에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 고대 왕정 시대 때 수십명의 왕비를 거느리는 것이 통용되던 시대에, 그 정도의 죄는 죄도 아니었던 것이 그 사회의 통념이지 않았는가?” -- 혹시 그리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만약 공의 혹은 공평의 개념이 시대에 따라 다른 것이라면, 보다 더 근본적으로 그 당시의 공의의 하나님과 오늘날의 공의의 하나님이 같지 않다는 말인가? 라는 반박에 대해 뭐라 답할 것인가? 또한, 자신의 아내를 빼앗긴지도 모르고 죽어간 장군 우리아에게 잇어서 공의 혹은 공평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 그리고, 사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공의’ 에 대한 사람의 정의가 하나님의 ‘공의’ 와 다를수 잇다는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보기에 전혀 공의롭지 않아 보이는 일들 조차도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쓰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워 나가는 것을 볼 때, 우리 자신에, 또한 우리가 사는 시대에 촛점을 맟춘 상식적인 해석의 위험을 분명히 알고 잇어야 할 것이다.

 

선악의 판단 뿐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신앙의 문제는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 외의 다른 것으론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때로 신앙의 눈으로 봐도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일들이 너무나 많다고 믿는다. 창조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이 다 알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반면에,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 도덕, 법률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고, 또 맨날 변한다. 사람에게서 만들어진 것들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 변하는 잣대로 영원히 불변하는 믿음의 개념과 그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것들을 재어 볼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어, 심판관이 되어 모든 것을 판단코자 하는 욕망의 원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수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의 가르침은 이런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적, 도덕적, 법률적으로 영원히 해결이 않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염려스러운 부분은 -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제 너무나 인본주의 적이어서, 심지어 신앙인들 중에서 조차도 영원한 신앙과 교회의 문제들이 세상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되고 있지 않는가? 하는 두려움이다. 또, 더 두려운 것은 주님이 머리되신 교회를 이끌어 가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깊은 신앙적인 고민없이 상식적 수준에서 교회의 일들을 판단하고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다. 혹시라도 그렇다면, 이런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기 보다, 교인들 의견과 여론조사 결과를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닌가? 혹시라도, 지도자들 가운데 이런 자기 자신을 justify 하려 한다면, 그런 지도자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의 의를 세우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으로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스스로는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며, 가장 근본적인 원죄에 가까운 선악의 판단을 쉽게 하는 죄를 범하면서, 사회적/도덕적/법률적인 것에 촛점을 둔다면, 그분의 신앙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묻지 않을수 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런 지도자들이 없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주님의 은총만을 바랄 뿐이다.

 

부디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신앙인들이 사회적/도덕적/법률적인 잘못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회개 없이 사는 것이 용서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각자 자신이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말고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을 때, 형제된 우리는 권면하고 잘못을 지적하여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잘못에 대한 심판은, 믿는 자의 행동에 대한 결과는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가라지 비유처럼, 우리는 추수의 날까지 인내하고, 우리에게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그 이해되지 않는 것을 어찌 사용하셔서 역사하시는 가를 감사하고 소망의 마음으로 기다려야 하리라 믿는다.

관련글 더보기